그래서 비트겐슈타인
책 선정 이유: 언어 공부를 해보고 싶었다. 말 잘하는 사람들의 대한 동경심. 그리고 말을 잘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무의식에 깔려져 있었던 것 같은데. 언어의 대해서 꼭 공부를 해라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 책을 선정했다.
언어 공부를 한다고 하면 단순히 국어책이나, 소설책, 혹은 문법책으로 접할 줄 알았는데 비트겐슈타인을 추천했다.
1.근대철학자라 그런지 너무 속시원한 철학관을 가지고 있는 비트겐슈타인이 너무 좋았다.
-말 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마라,
너무 단순 명료해서 좋았다. 이 문장이 말하는 의미가 너무 좋았다.
그러니깐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들을 다시 한번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다라고 이야기 해주니깐 속이 시원했다.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전혀 무의미한 물음이라고 말한다.
'산'이라는 말은 '산이 아닌 것'과 비교함으로써 의미를 지닌다.
모든 말은 이러한 성질을 지니고 있음으로 그 반대말(부정된 것)을 상상할 수 없는 것은 언어를 통해서는 표현할 수 없고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 모든 말은 그 말을 부정하는 말이 존재함으로써 의미를 지닌다.
2.특히 언어 파트.
내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곤 나의 고통뿐이며 아무리 애써도 타인의 고통에는 가닿을 수 없다는 말이
공감이 되기도 하면서 공감이 안되기도 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웃고 우는 것은 그러한 심정을 느끼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공감한 이유는 고통은 아무리 말해도 가닿을 수 없다는 말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애를 놓을 때를 아무리 말해도 절대 알 수 없듯이.
그렇게보면 고통이나 기쁨, 슬픔 이런 것들은 내가 경험하고 느낀 것에서만 타인의 것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3. 얼굴은 몸의 영혼이다.
얼굴은 나라는 동굴의 입구다.
그 입구에서 타인이라는 심연에서 얻은 정보를 받아들인다. 우리는 그 '얼굴 표정'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유추할 수 밖에 없다. 곧 얼굴은 자기라는 깊은 영역으로 이어지는 동굴의 입구와 같은 것이다;
영혼이라는 존재를 인정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인간의 몸이야말로 영혼과 마음에 대해 생각하는 유일무이한 장소이다.
진짜 듣다보면 너무 맞는 이야기다. 우리의 영혼이 있건 없건 그 진실은 우리가 알지 못하기에, 침묵해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나타나는 우리 얼굴이나 표정 가령(끔찍한 사건을 마주했을 때 일그러지는 표정이나, 드 넓은 바다의 노을을 보고있을때의 행복한 표정은 우리 영혼이 하는 말이 아닐까?
그래서 포커페이스가 잘 안되는 사람은 조금 더 영혼이 순수한 사람이 아닐까?
영혼이 말하는 대로 감정을 느끼니깐.
결론 :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하여라 , 그리고 나의 고통은 상대방에게 절대 닿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자, 언어의 한계는 분명 있지만 나는 늘상 언어게임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함으로써, 말할 때 조금 더 신중히 이야기 하고 싶어졌다.
주체[나]는 세계의 일부가 아니라, 세계의 경계인 것이다. 세계 그 자체가 나이므로 나의 외부에는 아무것도 없다.
세계에 나 한 사람밖에 없다면(독아론) 그 나는 존재 그 자체가 되어버릴 것이다.
이는 우리가 터무니없이 처절히 고독하다는 말이다. 이 세계에 누구 하나 자신과 같은 존재가 없으니까.
논리는 모든 경험에 앞선다.
일상적인 말의 주고받음을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게임이라고 불렀다. 누구나 가볍게 평소에 하는 일을 가리키는 게임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무척이나 비트겐슈타인답다고 생각한다. 어려운 말을 전혀 쓰지 않는 철학자니까.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에게 친근한 게임 같은 것으로서, 말을 이용한 활동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이미 게임을 하고 있다. 말을 사용하여 일상적으로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적인 상황이나 심신의 상황을 정확히 상대에게 전하려고 아무리 말을 해도 그것을 고스란히 표현할 수는 없다.
자신의 안쪽 사정을 나타낸다 하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알 수 있는 바깥쪽 언어를 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화가 성립한다. 사적인 것은 결코 언어화될 수 없다.
이 방에는 공기가 있다. 이 방에는 의자가 있다.
이 문장은 이 방안에는 ~가 있다라는 구조 때문에 무의식중에 공기와 의자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공기와 의자가 같은 것인 듯한 기분이 들고 마는 것이다.
이런 문법적 오류를 지적하는 게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철학이다.
진정한 지속 동사가 있다. 가령 먹다와 걷다라는 행위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반면 ㄹ수 있다 와 같이 나는 거꾸로 매달리기를 할 수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해도, 이 문장은 진정한 지속을 지니지않는다. 시간의 폭이 없다면 이는 먹다 걷아와 크게 성질이 다르다. 이런 단어는 이 현실 세계에 등장할 수 없다.
누구나 자신에 대해 '고통'이란 무엇인지, 오로지 자신에 관해서만 안다고 나는 말한다. 누구나 상자를 하나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 안에는 우리가 딱정벌레라고 부르는 것이 들어 있다. 가정해보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상자 속을 들여다볼 수는 없다. 그리고 누구나 자신의 딱정벌레를 본 것뿐이면서 딱정벌레가 무엇인지 안다고 말한다.
타인의 고통은 나의 고통에서 절대적으로 먼 곳에 있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곤 나의 고통뿐이며 아무리 애써도 타인의 고통에는 가닿을 수 없다.
무언가를 의심하기 위해서는 그러기 위한 기반이 필요하다.
설사 내가 거짓말을 한다 해도 아무도 모른다 라는 문장에서 한 학생이 어색함을 느껴 의심하여 사전을 찾아보니 설사가 아닌 가령이라는 단어를 써야 하는 것을 깨달았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배워온 국어 지식이나 책을 읽으면서 축적해온 지식이 없다면 칠판에 쓰인 그 한자에 대해 어색함을 느끼고 의심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자신의 지각을 믿는 일, 그리고 그 지각은 타인의 지각과 마찬가지임을 받아들이는 일, 국어를 통째로 받아들이는 일 등이 필요한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의 기억을 의심하지 않고, 선생님의 지식과 어른들의 지식을 온전히 신뢰해야 비로소 우리는 아주 의심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의심하기 위해서는 그 주변이 믿는 것으로 덮여 있어야만 한다. 믿는다는 마음이나 행위가 없으면 애초에 의심하는 마음이나 행위는 나타나지 않는다.
아이는 어른을 신뢰함으로써 배운다. 의심하는 것은 믿는 것 다음에 온다.
<확실성에 관하여>160
종교란 무엇일까.
비트겐슈타인은 스물한 살, 한 연극 대사를 듣고 종교의 가능성에 눈을 떴다고 한다.
'세계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나에게는 나쁜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였다.
그래서 그는 아무리 위험한 전장에 있어도 그렇게 무시무시한 죄를 입어도, 더없이 괴로운 경험 속에 있어도 자신은 절대적으로 안전하다는 감각이야말로 종교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비밀 일기>에서는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의한 철학적 인체실험의 기록을 볼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원하여 최전선에서 싸웠다. '육체'를 궁지에 몰아넣고 '영혼'만의 존재가 되려 한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종교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세계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나에게는 나쁜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감각을 실천(실전)에서 시험하려 한 것이다. 역시 이 철학자는 터무니없는 사람이다.
이 일기는 1914년~1916년에 걸쳐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군 동부전선 최전선에서 쓰였다. 25세부터 27세에 걸쳐 쓴 일기다. 그래서 논리 철학 논고의 니용은 첫 부분부터 논리학에 관하여 끝없이 이야기하는데, 갑자기 중간부터 인생이나 삶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사상을 이야기하는 수수께끼를 이야기하는 이유다.
당연하게도 그는 전장의 한복판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가 서 있던 곳은 정말로 온몸이 꽁꽁 얼어붙는 죽음의 위기에 닥쳐 있는 전장이었다고 한다. 불과 100만 명에서 150만명의 사상자가 나왔고, 그가 있던 보병사단의 생환율은 20%였다. 그렇기에 막연한 공포가 아니라 바로 눈앞에 닥친 자신의 죽음에 의해 <논리 철학 논고>후반부에는 예고 없이 나타나는 숭고한 형이상학을 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리라.
20세기 최대의 철학자가 행한 '인체실험'은 마치 '말할수 없는 영역'인 죽음에 최대한 접근하여, 그러나 말할 수 있는 영역인 삶의 측면에서 더 없이 공포에 전율하면서도 무모하게도 한 발 한발 다가가는 듯하다. 자신의 육체ㅘ 영혼을 희생하여 철학의 실천을 수행한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종교의 원친인 절대적인 영역(자신은 절대적으로 안전하다)을 스스로 체험하는 것을 과감하게 시험한 것이리라.
죽음의 가까움이 나의 생일 빛을 비춘다. 부디 신이 나를 비춰주시기를! 나는 벌레다. 그러나 신을 통해 나는 인간이 된다. 신이 내 곁에 있기를 아멘.
-1916년 5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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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지 이렇게까지 한 이유가 무엇일까. 비트겐슈타인의 일생이 궁금해진다.
비트겐슈타인. 무엇이 세계를 움직이는가? 최숙희 작가 1995년 (만화형식)
-그는 1889년 비엔나에서 8남매 중 막잰로 태어났다. 철강산업에서 으뜸이었던 그의 아버지의 어마어마한 재산으로 그의 가족들은 귀족풍으로 살 수 있었다. 그는 영국 맨체스터에서 항공학 공부를 하며 3년 동안 머물렀다. 그리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 논리 분야 교수였떤 러셀 밑에서 공부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논리의 근본을 연구하는 일을 비트겐슈타인에게 넘긴다. 1914년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 군대에 입대했다. 청년기부터 비트겐슈타인은 자주 죽음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나에게도 이제 인생이 어떻다는 것을 알 기회가 왔다. 죽음에 직면하고 있으니깐' 그는 2년 동안 열악한 환경, 또는 전쟁의 잔인함이나 무익함으로 고통을 받았다. 그리고 근무 중 틈틈이 자신의 정신 상태와 노트에 적은 논리에 관한 생각을 계속했다.
첫 책인 트락타투스
-첫 문장은: 세상은 사실들의 총체이다.
-마지막은.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
-철학의 목적은 사고의 논리적인 명시이다.
철학은 가르침이 아니고 활동이다.
철학은 주로 어떤 것을 분명히 밝히는 작업이다.
1930년대에 그의 철학의 목적은 평화로운 상태에 있는 사고이다.
(평화로운 상태에 있기 위한 사고를 하기 위해 철학을 한다. 그럼 평화로운 상태란 언제인가? 아무래도 불확실한 상황이 줄어들면 나름의 평화로운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 불확실성은 나를 불안감과 불행의 카테고리안으로 집어넣는다.
근데 인생 사는 것 자체가 엄청난 불확실성에서 계속 사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삶은 역동적이다. 계속 움직인다. 우리는 계속해서 무엇을 한다. 일을 하고, 밥을 먹고, 산책을 하고, 운전을 하고, 손을 씻고, 청소를 하고,,, 심지어 잠을 자는 것 조차 우리는 사실 무엇을 한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순간이 있는가? 어쩌면 그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가장 평화로운 상태가 아닐까?
아니면 역동적으로 계속해서 무언가를 하는 행동 자체가 평화로운 상태일 수도 있다.
이것도 아니면 둘 다이다. 내가 역동적으로 계속 무엇을 할 때 평화로운 사람이 있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명상하는 상태에서 평화로움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불확실성속에서 불확실성을 없애는 것. 이 게 바로 평화로움에 다다르는 첫 번째 걸음이 아닐까?
근데 과연 이 것이 가능할까? 철학을 통해 가능하다. 철학은 나의 생각과 사고를 저 멀리 지평선에 둔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따르면, 말할 수 없는 것들에 침묵하고 말할 수 있느 것들(사실)에 집중함으로써 현실, 현재에 집중할 수 있게 도와준다. 내 방에 아기가 있는지 없는지, 아기가 우는 이유가 배가 고픈 것인지 아닌지 사실에 입각하여(아이가 우는 현재 사실)행동하는 게 현명하고 또 평화로운 상태에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잡히지 않는 것들을 보려하지말고, 잡히는 것들을 보고 느껴라. 그게 삶이고, 그게 인생이다. 그게 전부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과 함꼐 다른 사람들과 함께 평화롭게 살아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각자의 삶의 방식'과 밀접하게 연결된 사고의습관 속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언어와 삶의 방식 간에 분명한 연관이 있음을 알았다.
"우리의 삶의 방식은 언어에 그대로 반영됩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치료 요법
그는 다른 수 많은 전통적인 철학들이 해 왔떤, 어떤 입장을 세우기 위한 논쟁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우리 마음과 짜맞춘 인위적인 통일성을 깨부수기 위해 우리에게 비판하고 전복할 수 있는 기술을 가르쳤다.
세익스피어의 나오는 문구를 나의 모토로 삼고 싶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차이점을 가르쳐 줄거야"
생각은 순식간에 일어날 수 있지만, 그것을 보고하는 것은 그렇지 못하다. 생각들이란 한 기차의 각각의 객식들처럼 부분을 이루며 지나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들이 순간에 일어난다고 할 때, 그것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를 갑자기 알게 된다는 뜻이지,
우리 안에서 무언가가 갑자기 일어났따는뜻이 아니다.
생각함이라는 식의 개념은 경험의 개념이 아니다. 생각은 생산품이라기보다는 표시이다.
(생각은 표시이다. 생각은 생산품이 아니다. 생각으로 생산품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이유는 생각으로 나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내가 알게 모르게 믿고 있는 모든 신념들에 따라 나의 행동은 좌지우지 되기 떄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항상 생각은 생산품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믿어왔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의 의하면 표시란다. 생각은 표시다. 어떤 표시를 말하는 것일까? 내가 더운날 물이 떠오른다면
그건 내가 목이 마르고 내 몸이 물이 필요하다는 표시이다. 내가 읽은 오늘의 책에서 밑줄 그은 이 구절은 나의 내면의 어떤 부분을 자극했고 공감했기 때문에 나는 밑줄을 그었다. 이건 명백히 나의 내면을 반영한 표시이다.
이런 측면에서 생각은 생산품이기도 하고 표시이기도 하다. 생각은 내 인생을 창조한다. 내 신념에 따라 내 인생은 바뀐다. 그런 측면에서 생산품이다. 하지만 물, 음식, 사람, 사랑이 필요하다는 표시이자 징표가 되기도 한다. 이런 문백에서 생각은 내가 가진 것중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다. (신체가 없어도 자유롭게 생각할 수만 있다면!)
수학은 우리의 삶의 형태에 달려 있다.
만일 우리가 적외선만으로 볼 수 있는 지능적인 외계인이라면,
그래서 슬금슬금 기어다니기만 하고 삼차원 공간의 원환체보다는 사차원 공간의 클라인병을 더 쉽게 상상할 수 잇으며 부조화를 기뻐하는 존재라면, 우리는 다른 수학을 가졌을 것이다.
우리의 삶의 형식에서는 자의 눈금이 변하지 않으며 아이들은 기초 산술 훈련을 받고 그것을 암기하여 익힌다. 음악과 수학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수학은 우리 삶의 이런 사실들에 의존한다.
통증을 느끼는 경험은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나라는 존재가 있따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아픔의 강도나 위치 등등을 구별해 내지만, 소유자를 구별하지는 못해요.
아무도 소유하지 않는 고통은 어떤 종류의 사물일까? 전혀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는 고통?
의미에 둔감한 사람은 일종의 감각 경험이 없거나 말을 하고 설명을 할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민감성이 부족한 것이다. 그는 의미를 경험하지 못한다.
그는 그가 말하고자 의도한 것을 말할 수 있지만 그는 빈약한 내적 생활을 영위해야 한다.
"그에 대한 나의 태도는 영혼을 향한 태도이다.
그가 영혼을 가졌다는 말이 아니예요. 인간의 신체는,
인간의 영혼을 나타내는 가장 훌륭한 그림이죠."
우리는 우리만의 세계안에 있고, 타인은 그 안에 있는 등장인물에 불과하다.
나라는 것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가 없다. 하나의 무대이자 하나의 세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신기하게도 언제나 앞면만을 향한다. 영화관의 스크린에 영화 자체를 쏘는 영사기가 스크린 뒷면을 보는 것이 불가능하듯, 언제까지고 앞면만을 향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라는 무대를 만들어간다. 그 무대에서 삼라만상이 전개되는데, 그중에 자꾸만 나에게 말을 거는 존재가 있다. 바로 인간이다.
그리고 나도 점점 그 존재들이 사용하는 음성을 자연스럽게 습득하고, 그 존재들과 마찬가지 소리를 내고, 그 존재들과 공동으로 생활한다. 그런 존재들이 있음으로써 어떤 의미에서 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비로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무척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와 타인은 전혀 차원이 다른 격리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데 동시에 나 자체의 모습을 가르쳐주는 것도 그 격리된 타인인 것이다. 타인이 없다면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이라는 책에서 논의한 나에게서 절대적으로 격리된 타자도 상호보완적인 모습에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는 전혀 알지 못하지만 나를 응시하는 것이다. 지구의 주민에게는 한쪽 면밖에 보여주지 않는 달(반대쪽은 절대로 알 수 없다)처럼 나에게 한쪽면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상대의 면은 '얼굴' 혹은 그곳을 '표정'이라고 부른다.
.....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논리 철학 논고 마지막에 쓴 말로, 기존 철학자를 향한 것이다.
신이나 윤리등에 관해 다양한 말을 해온 전통적인 철학자들에 대해, 확실히 답이 나오지않는 것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논의해도 전혀 의미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말해도 소용없는 일에 관해서는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이다. 아무 말이나 뱉는 것은 철학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신'이 존재하는지 아닌지 판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진실이 뭔지 알지도 못하면서 실없는 소리를 지껄이지 말라는 것이다.
얼굴은 몸의 영혼이다.
얼굴은 나라는 동굴의 입구다.
그 입구에서 타인이라는 심연에서 얻은 정보를 받아들인다. 우리는 그 '얼굴 표정'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유추할 수 밖에 없다. 곧 얼굴은 자기라는 깊은 영역으로 이어지는 동굴의 입구와 같은 것이다;
언어 게임에서 의사소통 가능성의 가장 중요한 장소는 표정이 나타나는 장소이자, 동시에 사령탑인 뇌가 있는 머리의, 심지어 전면에 있는 얼굴이다.
인간의 몸이야 말로 인간의 영혼을 가장 잘 드러내는 그림이다.
영혼이라는 존재를 인정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인간의 몸이야말로 영혼과 마음에 대해 생각하는 유일무이한 장소이다.
언어는 인간이 지니는 심적 내용고는 전혀 다른 것이다. 따라서 인간 내부의 사건과는 완전히 괴리되어있다.
확실히 인간이 말을 쓸 때 자기 자신의 발성ㄱ ㅣ관을 통해 말하거나 펜을 사용하여 글자를 쓰거나 하지만 자신의 생각이나 심정이 그대로 언어화되는 것은 아니다.
언어의 한계 ; 우리의 존재에 깊이 관여하는 절대적인 것을 표현할 수 없다는 한계다.
비트겐슈타인의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전혀 무의미한 물음이라고 말한다.
'산'이라는 말은 '산이 아닌 것'과 비교함으로써 의미를 지닌다.
모든 말은 이러한 성질을 지니고 있음으로 그 반대말(부정된 것)을 상상할 수 없는 것은 언어를 통해서는 표현할 수 없고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 모든 말은 그 말을 부정하는 말이 존재함으로써 의미를 지닌다.
이 세계는 '존재'로 흘러넘친다. 존재 이외에는 그야말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제시한 것은 명백히 이상한다. 존재에는 의미가 없다.
반대어는 무일까. 그러나 이 세계 어디를 찾아도 무는 없다. 그렇게 되면 존재라는 말을 이 세계에서는 쓸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존재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수없이 던져도 우리는 결코 그 답을 얻을 수가 없다.
어떤 의미에서 절대 바뀌지 않는 인간의 근원적 태도라고 비트겐슈타인은 말하고 싶어 한 것이 아닐까.
프로이트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무의식의 영역이 실은 의식적인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러한 무의식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따라서 꿈을 제대로 해석하면 자신의 무의식을 정확히 해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왜 우리는 꿈을 꾸는가 하는 문제와 왜 우리는 이야기를 쓰는가 하는 문제를 비교해보자.
사람들이 대화하는 것에 단 하나의 이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린 아이는 이따금 온전히 기쁨을 드러내기 위해 목소리를 높여 언어가 아닌 한마디를 뱉는다. 이는 또한 성인이 대화하는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다양한 이유로 그때마다 언어 게임을 한다. 언어의 다양한 주고받음 속에 무언가 깊은 이유가 있거나 구조가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소리를 내고 싶어서, 그저 화를 폭발시키고 싶어서, 그저 인사하고 싶어서 등 얼마든지 우리는 말을 내뱉는 기회와 계기를 지닌다. 그리고 그것은 날마다 주고받는 말을 살펴보면 자연히 알게 된다.
표층 문법을 의식 수준, 심층 문법을 무의식 수준이라고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