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젊은 여자들은 고마운 걸 몰라', '남편이 얼마나 밖에서 고생해 돈을 벌어 오는지도 모르고 만날 외식에, 카페에, 그러면서 퇴근해 돌아온 남편 설거지 시킨다니까'와 같은 말들이 클리셰처럼 울려퍼졌다. 시어머니의 말이었다.
그분은 평생을 전업주부로 사신 분이었다. 외모도, 패션 감각도 뛰어났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여자 팔자는 뒤웅박'이라거나 '여자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성차별적 개념으로 점철된 말들뿐이었다. 입만 열면 '여자는'이라는 말이 나온다는 건 자신이 평생 그 말을 들어왔다는 소리 아니겠는가. 여자는 이래야 한다, 여자는 저래야 한다는 말에 순종하며 살아온 그분은 그렇게 살지 않는 요즘 젊은 여성들을 보며 자신의 인생이 부정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이 모든 건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로 넘어가면서 유교가 들어오면서 여성관이 바뀌기 시작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니 우리 엄마, 할머니, 증조할머니 등, 우리 조상님들이 숱하게 들었을 유교사상과 여성관에 대해서는 이 나라 잘못이 맞다. 거기에 조선에서 유교를 받아들인 왕과 그 신하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 그리고 그렇게 유전적으로 이어받게 되는 여성관이 21세기까지 이어져 내려오게 되었다. 하지만 이 여성관은 이미 지금도 많이 바뀌게 되었고, 22세기에서는 완전히 바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믿고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돈이 아닌 관계가 중심이 되는 곳, 물질보다 정신이 중요시되는 곳, 그렇기에 종교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곳. 그런 세상에 몸담으면서 한편으로 편안함 혹은 뭉클함 같은 걸 느끼게 되는 이유였다.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돈을 주어야 구하는 세상에 살면서 정작 자신이 수행한 일 곧 가사에 대해서는 한 푼도 받지 못하는 이들, 자신의 일을 '일'이라 말하지 못하는 이들이 딛고 선 공간은 사랑과 헌신의 이름으로 꾸며져 있지만 화려한 치장을 들추면 소외감과 황량함으로 어쩔 줄 몰라하는 영혼들이 숨 가쁘게 일상을 이어가는 외딴섬이다.
▶아무래도 본인이 자본주의에서 떨어져 지내다보니 자연스레 돈이 아닌 관계와 정신이 중심이 된다. 그래서 엄마들 모임에서는 돈보다는 공감, 친밀함이 제일 중요한 모양이다. 나도 이상한게 엄마들 모임에서는 돈, 성공, 성취 보다는 육아로 인한 스트레스, 아이 훈육법과 같은 교육법, 간단한 아이 반찬 요리법 등을 공유하는 게 훨씬 더 이득이라 생각한다. 어차피 그거 이야기 나누려고 만나는 거니깐.
전업주부들은 남편이 자신이 집에서 하는 일의 가치를 알아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남성이 여성의 역할에 관해 솔직히 얘기할 때, 전업주부를 비하하는 경향을 보인다. 남편들은 아내의 뒷바라지에 고마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성을 존중하지 않는다.
▶이건... 팩폭으로 전업주부도 잘못한 게 있다. 8시간 출퇴근 시간 꼬박 10시간 ~12시간 일하고 온 남편과 달리 엄마들이 하루에 일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청소하고 빨래하고 요리하고 설겆이하고 육아하고 이 모든 시간이 절대 남편의 근무시간과 똑같을 수는 없다. 그리고 똑같아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반복적이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는 이 모든 일들이 중요하지 않은 건 절대 아니다. 이런 일에 스스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가가 중요하지 않을까? 하지만 스스로도 이 모든 일을 해내는 본인을 귀하게 여기는지, 아니면 남들 처럼 보잘 것 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여기지 않는지, 자기검열이 먼저 필요하다. 자기 스스로 본인의 일에 본인의 내조에 본인의 전업주부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남편이 어떻게 그걸 존중해줄 수 있을까? 스스로도 존중하지 않는 일인데 말이다.
직장 생활을 한 비혼 남성과 아이 셋을 길러낸 전업주부 여성을 예로 들어보자.
아이 없이 돈을 벌었던 남성은 은퇴 후 죽을때까지 두둑한 연금을 받게 되지만 전업주부가 길러낸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교육해 사회의 일꾼으로 길러낸 전업주부는 비혼 남성과 같은 연령이 되었을 때 아무런 사회보장을 받지 못한다.
세상에 주부가 없다면 자본주의는 일거에 무너질 것이다. 주부가 남편인 노동자에게 해주던 온갖 종류의 무상 재생산 서비스가 사라지면 노동자는 그 모든 서비스를 돈을 주고 구매해야 할 테고, 그런 상황은 필연적으로 임금 인상이라는 결과를 낳을 테니. 그러니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마차가 굴러가게 하는 것은 노동자가 아니라 노동자를 무상으로 재생산해주는 주부이다.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인데... 차라리 주부가 행하는 모든 서비스를 유료화시키면 임금 인상에, GDP도 오르고, 좋은 것 아닌가? 근데 그러면 여자들은 전부 다 주부가 되려고 하겠지..? 그러면 나라차원에서 인력낭비일 수도 있지. 이거 안하면 뭐라고 배우고 자격증 하나라도 따서 사회에 더 큰 부가가치 창출을 일으킬 수 있는데 주부일만 한다니.
엄마에게 음식이란 단지 가족을 위한 희생만이 아니다. 상대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표현하는 방식이자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즐거움이고, 부엌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고도의 경영이자 무뚝뚝한 자식과 대화하는 매개이기도 하다. 음식을 싸주고 먹이는 대상이 늘어날수록 엄마의 세계도 함께 넓어져 왔다. 그리고 이제 그 세계에는 나의 동거인도 포함된다.
가사를 제 손으로 하지 않는 사람은 온전한 인격체로 존재하기 힘들다.
▶하지 않아본 사람은 절대 모르기에, 절대적으로 공감한다.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며 함꼐 사는 일상을 조율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다면 결혼이라는 제도가 사랑으로 만난 두 남녀에게서 빼앗아가는 게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바로 '자발성에 따른 행동'이었다. 40여년 동안 다르게 살아온 두 성인이 만났기에 둘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때때로 치열한 싸움을 벌이지만, 두 여성은 상대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를 나중에 이해하면서 차츰 서로를 이해하고 타협해간다. 남편과 아내의 역할뿐만 아니라 양가 집안에 대한 의무와 관계의 양상이 미리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전통이라 불리는 어른들 말씀에 강제로 따르다 보면 새롭게 관계를 맺게 된 이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기 마련인 호기심과 관심, 호감이 소멸된다. 모든 게 정해져 있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예의가 아니라는데 어떻게 상대에 대해 궁금해하고 호감을 표할 수 있겠는가. 강제된 관계와 정해진 의무, 그것을 하지 않았을 때 따라오는 박한 평가는 사람을 움츠러들게 만들고, 잔뜩 움츠린 사람은 관계에서 아무런 기쁨도 느끼지 못하게 된다. 결혼한 사람들이 왜 배우자의 가족을 호감보다 부담으로 느끼는지, 왜 결혼으로 맺은 새로운 관계들에 진절머리를 내는지, 선명하게 알려준다.
▶자발성에 따른 행동, 이 게 부족해서 두 사람이 그토록 싸우는 것 같다. 그럼 이런 자발성에 따른 행동은 어디서 나올까? 이건 내가 자랐던 환경 속 부모님들을 통해 나온다. 남편과 아내의 역할뿐만 아니라 양가 집안에 대한 의무, 관계에 대한 어른들이 부르는 전통이라는 말에 진절머리가 난다. 나는 진절머리가 나기 전에 그냥 포기했다. 내가 다 양보한다. 그러니 오히려 마음이 더 편해졌다. 오히려 이런 환경속에서 자란 내 남편이 대견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장남이고 장손이라서 뭐든지 잘 이끌어야 하고, 잘 해야 하고, 이런 부담감 속에서 자란 남편이니깐. 나는 막내딸이라 내가 지닌 막중한 임무나 책임감 같은 건 없었다. 다들 언니가 다 했으니깐. 그렇게 생각하니 나도 오히려 동참해서 남편 기 살려주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어쨌든 나는 내 자식에게 이런 전통에 대한 의무감은 주지 않을것이다. 대신, 이 진절머리나는 전통, 집안의 의무에 대해서는 결혼 전에 충분히 이야기 해줄 필요성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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